한국에서 공무원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오늘날 가장 익숙한 대답은 시험이다. 5급, 7급, 9급 공개경쟁채용시험이 있고, 직렬에 따라 정해진 과목과 면접을 거친다. 합격하면 국가가 정한 절차에 따라 공무원으로 임용된다. 한국 사람에게는 너무 익숙한 방식이다. 그런데 조금 이상한 질문을 해보자. 국가의 중요한 일을 맡길 사람을 왜 시험으로 뽑아야 할까? 왕이 마음에 드는 사람을 직접 임명할 수도 있다. 좋은 집안에서 태어난 사람에게 관직(官職, gwanjik, government office)을 줄 수도 있다. 돈을 받고 관직을 팔 수도 있다. 어릴 때부터 국가가 유능한 사람을 골라 직접 교육한 뒤 관리로 만들 수도 있다. 실제로 세계 여러 문명은 그렇게 했다. 그런데 한국의 역사에서는 아주 오래전부터 반복해서 하나의 방법이 등장한다. 시험을 보게 하자. 누가 경전을 잘 이해하는지 시험한다. 누가 좋은 글을 쓰는지 본다. 국가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 묻는다. 군인이 될 사람에게는 활을 쏘게 하고 말을 타게 한다. 시대가 바뀌면서 시험과목도 바뀌었다. 그리고 천 년이 훨씬 지난 지금도 수많은 한국인이 다시 시험장으로 간다. 한국의 공무원 시험은 도대체 어디에서 시작됐을까.

788년 신라, 책을 얼마나 읽었는지를 평가하기 시작했다
이야기는 통일신라까지 올라간다. 788년 원성왕 때 **독서삼품과(讀書三品科, dokseo sampumgwa, three-grade reading examination)**가 시행된다. 이름 그대로 유교 경전을 얼마나 잘 읽고 이해했는지를 기준으로 학업 능력을 세 등급으로 평가하고, 그 결과를 관리 등용에 활용한 제도였다. 『곡례』와 『효경』을 읽은 사람은 하품, 『논어』·『곡례』·『효경』을 읽은 사람은 중품, 『춘추좌씨전』·『예기』·『문선』을 이해하고 『논어』와 『효경』에도 밝은 사람은 상품으로 평가했다. 오경과 역사서, 제자백가에 두루 통달한 사람은 등급을 뛰어넘어 발탁할 수도 있었다. 오늘날 국가공무원 공개채용시험과 같은 제도는 아니었다. 국학에서 공부한 사람들의 학업을 평가하는 성격이 강했고, 전국에서 누구나 같은 시험지를 풀어 성적순으로 관리가 되는 구조도 아니었다. 그래도 중요한 변화가 있었다. 태어난 집안뿐 아니라 무엇을 얼마나 배웠는지도 관리 선발의 기준으로 삼아보자는 생각이 국가제도 안으로 들어온 것이다. 그런데 신라에는 훨씬 강한 제도가 있었다. **골품제(骨品制, golpumje, hereditary bone-rank system)**다. 사람이 어떤 집안에서 태어났는지에 따라 신분과 사회적 지위가 결정됐고, 올라갈 수 있는 관직의 한계도 달랐다.
시험을 잘 본다고 이 벽을 자유롭게 넘어갈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쉽게 말하면 신라에는 시험이 등장했지만 시험보다 출생이 더 강했다.
그 무렵 유럽과 중동에서는 어떻게 사람을 뽑았을까?
788년이면 유럽에서는 샤를마뉴가 프랑크 왕국을 확대하던 시대다. 중동에서는 아바스 칼리파국이 바그다드를 중심으로 거대한 국가를 운영하고 있었다. 이들도 당연히 세금을 걷고, 문서를 작성하고, 법을 집행하고, 군대를 움직여야 했다. 그러려면 관리가 필요하다. 그런데 사람을 뽑는 방식은 상당히 달랐다.
유럽 — 시험장보다 귀족과 교회
중세 초기 서유럽에는 현대 국가와 같은 전국적인 공개경쟁시험이 없었다. 왕은 귀족, 봉신, 지방 유력자, 궁정 인물, 그리고 성직자에게 여러 행정 업무를 맡겼다. 특히 글을 읽고 라틴어 문서를 작성할 수 있는 교육받은 인력의 상당 부분은 교회와 수도원에 있었다. 국가에 글을 읽고 문서를 작성할 사람이 필요하다면 전국 시험을 여는 것이 아니라, 이미 교육받은 사람을 왕과 귀족, 교회 네트워크에서 찾는 방식에 가까웠다. “시험 성적이 가장 높은 사람을 국가가 뽑는다.” 이것이 당시 서유럽 행정의 기본 원리는 아니었다.
아바스 칼리파국 — 관료제는 매우 정교했다
중동은 또 달랐다. 아바스 칼리파국에는 이미 복잡한 디완(dīwān, government department) 조직이 있었다. 재정, 세금, 군사, 서신, 기록 같은 업무가 점점 전문화됐고, 이를 담당하는 서기관과 관료층도 발달했다. 즉 이슬람권에 전문 관료제가 없었던 것이 아니다. 오히려 거대한 영토를 움직이기 위해 정교한 행정 체계를 갖췄다. 차이는 사람을 충원하는 방법이었다. 교육받은 서기관, 행정 경험, 관료 가문, 궁정과의 관계가 중요했다. 신라의 독서삼품과처럼 일정한 학업 성취를 별도의 국가 시험과 연결하는 방식과는 달랐다. 같은 시대에도 관료제가 얼마나 발달했느냐와 관료를 어떻게 뽑느냐는 전혀 다른 문제였다.
958년 고려, 국가가 본격적으로 시험을 열다

약 170년이 지난 958년. 고려 광종 때 중요한 변화가 일어난다. 후주에서 고려로 온 쌍기가 광종에게 과거제(科擧制, gwageo-je, state examination system) 실시를 건의한다. 광종이 이를 받아들인다. 한국 역사에서 본격적인 국가 관료 선발시험이 시작된다. 첫 시험에서는 시(詩), 부(賦), 송(頌), 시무책(時務策) 등을 평가했고, 제술업·명경업·잡업에서 모두 7명의 합격자가 나왔다. 숫자는 고작 7명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합격자 숫자가 아니었다. 왕이 국가 차원에서 시험을 열고 그 시험을 통과한 사람을 관리(官吏, gwanri, government official)로 선발한다는 제도가 자리 잡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고려의 과거제는 중국에서 발달한 시험 관료제의 영향을 받아 들어온 제도였다. 그러나 같은 시기 유럽과 중동의 관료 충원 방식과 비교하면 차이는 꽤 크다.
광종이 갑자기 공정한 채용을 하고 싶었던 것은 아니다
과거제를 오늘날의 능력주의 시험과 똑같이 이해하면 안 된다. 광종에게는 정치적인 이유도 컸다. 고려 건국 초기에는 지방의 **호족(豪族, hojok, powerful local clans)**이 강한 힘을 갖고 있었다. 군사력과 경제력, 지역 지배력을 가진 세력들이었다. 왕이 관리가 필요할 때마다 이런 유력 가문의 사람만 등용한다면 왕권도 계속 그들에게 의존하게 된다. 과거제는 왕이 새로운 사람을 발굴할 수 있는 통로였다. 즉 시험은 인재선발제도이면서 왕권강화 수단이기도 했다. 국가시험은 처음부터 단순한 교육제도가 아니었다. 권력의 구조를 바꾸는 정치제도이기도 했다.
같은 10세기 유럽과 중동에서는?
10세기 서유럽에서는 왕과 황제가 존재했지만 지방의 귀족, 영주, 교회, 봉신이 막대한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 관리 선발에서도 가문, 토지, 충성관계, 종교기관, 왕과의 관계가 중요했다. 왕이 국가 전체에 시험공고를 내고 수험생을 모아 점수순으로 관리로 뽑는 체계가 아니었다. 중동에서는 아바스계 행정 전통과 여러 이슬람 국가의 전문 관료조직이 계속 발달했다. 서기관과 재정 담당자, 재상, 여러 행정부서가 거대한 국가를 움직였다. 여기서 다시 중요한 것은 관료제가 있었느냐가 아니다. 고려도 관료제가 있었고 중동도 관료제가 있었다. 유럽의 왕국에도 행정조직이 있었다. 차이는 그 관료를 어떻게 충원했느냐였다. 고려에서는 시험이 국가 운영의 중요한 진입 통로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고려의 과거제에는 중요한 빈틈이 있었다
고려의 과거시험은 여러 분야로 나뉘었다. **제술과(製述科, jesulgwa, composition examination)**는 시와 글을 짓고 주어진 문제에 답하는 능력을 평가했다. **명경과(明經科, myeonggyeonggwa, Confucian classics examination)**는 유교 경전에 대한 기억과 이해를 봤다. 기술 분야를 선발하는 **잡과(雜科, japgwa, specialist examinations)**도 있었다. 그런데 이상한 부분이 하나 있다. 군인을 정식 국가시험으로 선발하는 무과가 고려에서는 거의 정착하지 못했다. 고려에도 무과가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다. 1390년 공양왕 때 한 차례 시행됐지만, 고려 전체를 놓고 보면 사실상 지속적인 무관 선발시험으로 기능하지 못했다. 고려에도 당연히 **문관(文官, mungwan, civil official)**과 **무관(武官, mugwan, military official)**이 있었다. 문반(文班, munban, civil branch)과 무반(武班, muban, military branch)을 합쳐 **양반(兩班, yangban, the two official branches)**이라고 불렀다. 훗날 양반이라는 말은 사회적 신분층을 가리키는 의미로 더 넓어졌다.
그런데 이름은 양쪽이 나란히 있어도 실제 정치적 위상은 같지 않았다.
고려에서는 글 쓰는 사람이 칼 쓰는 사람보다 높았다
고려 사회에서는 문신(文臣, munsin, civil official) 우대가 강했다. **무신(武臣, musin, military official)**은 정치적 승진에서 여러 제약을 받았다. 토지 분배에서도 불리했고, 군사 지휘권까지 문신에게 넘어가는 일이 있었다. 서희, 강감찬, 윤관, 김부식처럼 오늘날 전쟁과 함께 기억되는 인물 가운데도 실제로는 문신 출신이 많다. 고려에서 군대가 중요하지 않았다는 뜻이 아니다. 국경전쟁도 많았고 거란과 여진 같은 강력한 세력과 계속 맞서야 했다. 그런데 국가의 정치 엘리트 질서는 문신 쪽으로 크게 기울어 있었다.
같은 시대 유럽은 오히려 반대였다
11~12세기 서유럽에서는 전투를 담당하는 귀족계급의 정치적 위상이 상당히 높았다. 기사와 전사귀족은 단순히 월급을 받는 직업군인이 아니었다. 토지를 지배하고, 사람을 거느리고, 군대를 제공하고, 정치에도 참여하는 지배층과 강하게 겹쳤다. 즉 고려에서는 문신이 군사 지휘권까지 갖는 경우가 있었던 반면, 유럽에서는 군사력을 가진 귀족이 곧 정치적 지배층인 경우가 많았다. 같은 중세 사회에서도 무력을 가진 사람을 정치체제가 대우하는 방식은 꽤 달랐다. 그리고 고려에서는 이 문제가 결국 폭발한다.
1170년, 그 차별이 폭발한다
고려 의종 시기에 무신들의 불만이 폭발한다. 정치적 차별, 승진의 한계, 경제적 불만, 문신들의 멸시가 오랫동안 쌓였다. 유명한 사건도 있다. 왕 앞에서 무신들에게 수박희를 시켰고, 문신 한뢰가 나이가 많은 대장군 이소응의 뺨을 때려 계단 아래로 떨어뜨렸다. **대장군(大將軍, daejanggun, senior military commander)**까지 공개적으로 모욕당하는 상황이었다. 1170년 정중부와 이의방 등을 중심으로 무신들이 정변을 일으킨다. **무신정변(武臣政變, Musin Jeongbyeon, military coup of 1170)**이다. 문신들이 살해되고 왕 의종은 폐위된다. 이후 고려 정치에는 약 한 세기에 걸친 무신정권(武臣政權, musin jeonggwon, military regime) 시대가 이어진다. 이걸 단순히 “무과시험이 없어서 군인들이 반란을 일으켰다”고 설명하면 틀린다. 원인은 정치적 차별, 군사 지휘체계, 토지 문제, 의종의 정치 운영, 문신들의 모욕 등 여러 요소가 겹쳐 있었다. 그래도 국가 엘리트 선발의 관점에서 보면 재미있는 장면이 나온다. 고려는 시험을 통해 문신 엘리트를 체계적으로 키웠다. 무신에게는 그와 같은 강력한 정치적 상승통로가 충분하지 않았다. 결국 무신들은 시험장이 아니라 정변을 통해 최고 권력을 차지했다.
1392년 조선, 문과와 무과를 함께 운용하다

1392년 조선이 건국된다. 조선은 고려의 과거제를 이어받으면서 선발체계를 더 체계적으로 정비했다. 과거시험은 크게 문과(文科, mungwa, civil examination), 무과(武科, mugwa, military examination), **잡과(雜科, japgwa, specialist examinations)**로 나뉘었다. 문과에서는 문관을 뽑았다. 무과에서는 무관을 뽑았다. 잡과에서는 역학, 의학, 음양학, 율학 같은 전문 분야의 기술관을 선발했다. 오늘날의 공무원 직렬과 완전히 같은 개념은 아니다. 그래도 국가가 필요한 인력을 분야에 따라 시험으로 나누어 선발한다는 점에서는 상당히 익숙한 구조다.
양반이면 자동으로 관리가 된 것은 아니다
조선의 **양반(兩班, yangban)**을 단순히 유럽의 세습귀족과 동일하게 생각하면 여러 부분에서 오해가 생긴다. 좋은 가문에서 태어나는 것은 엄청난 이점이었다. 교육을 받을 수 있었고, 책을 구할 수 있었고, 좋은 스승을 만날 가능성이 높았다. 몇 년 동안 돈을 벌지 않고 시험공부만 할 경제적 여유도 있었다. 이런 차이는 컸다. 그런데 양반 집안에서 태어났다고 무조건 고위관리가 되는 것은 아니었다. 높은 정치적 지위로 올라가기 위한 가장 강력한 방법 가운데 하나가 **문과 급제(文科及第, mungwa geupje, passing the civil examination)**였다. 그래서 유명한 가문에서는 몇 대에 걸쳐 누가 문과에 급제했는지가 가문의 위신을 보여주는 중요한 기록이 됐다. 조선은 신분사회였다. 그런데 동시에 치열한 **관직 경쟁(官職競爭, gwanjik gyeongjaeng, competition for government office)**도 존재했다. 시험은 있었지만 출발선은 평등하지 않았다.
시험을 보지 않고 관리가 되는 방법도 있었다
조선에서 관리가 되는 길이 과거시험 하나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대표적으로 **음서(蔭敍, eumseo, appointment through family privilege)**가 있었다. 고위 관리의 자손 등에게 가문의 지위를 바탕으로 관직 진출 기회를 주는 제도다. 또 하나는 **천거(薦擧, cheongeo, appointment by recommendation)**다. 능력과 인품이 있다고 평가받는 사람을 다른 관리가 추천해 등용하는 방식이다. 즉 조선의 관료 충원 방식에는 시험, 가문, 추천 등 여러 통로가 함께 존재했다. 그래도 정치 엘리트 사회에서 가장 강한 명예와 정당성을 가진 통로 가운데 하나는 여전히 **과거 급제(科擧及第, gwageo geupje, passing the state examination)**였다.
문과에서는 뭘 물었을까?
문과라고 해서 유교 경전 문장을 그대로 외워 적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았다. 경전을 이해하는 능력, 글을 논리적으로 만드는 능력, 국가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하는 능력도 평가했다. 특히 **책문(策問, chaengmun, policy question)**이라는 형태가 흥미롭다. 왕이나 국가가 문제를 제시한다. 국방을 어떻게 강화할 것인가. 세금을 어떻게 운영할 것인가. 백성의 생활을 어떻게 안정시킬 것인가. 수험생은 그 문제에 대한 정책적 의견을 글로 써야 한다. 현대식 표현을 빌리면 일종의 정책논술이다. 시험을 잘 본다는 것이 단순히 책을 외우는 능력만을 의미했던 것은 아니다.
무과에서는 실제로 활을 쐈다
무과는 이름 그대로 무관을 뽑는 시험이다. 실제 무예를 평가했다. 활을 쏘고, 말을 타고, 여러 군사기술을 시험했다. 그런데 무예만 잘한다고 끝나는 것은 아니었다. 군사 관련 지식과 병법에 대한 이해도 필요했다. 국가가 필요로 한 사람은 단순히 싸움을 잘하는 사람이 아니라 군대를 이끌 수 있는 군사 관료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선의 무과는 현대적으로 비유하면 실기시험, 군사능력 평가, 군사학 지식시험이 섞인 형태에 가까웠다.
같은 시대 프랑스에서는 관직을 돈으로 살 수도 있었다

여기서 다시 세계를 보자. 조선의 젊은 선비들이 몇 년씩 유교 경전을 공부하며 문과를 준비하던 시절, 유럽의 일부 국가에서는 전혀 다른 관직 문화가 존재했다. 특히 프랑스 구체제에서는 **관직매매(官職賣買, sale of offices)**가 크게 발전했다. 왕실은 재정을 마련하기 위해 여러 종류의 관직을 돈을 받고 판매했고, 일부 관직은 조건을 갖추면 후손에게 넘길 수도 있었다. 17세기 이후에는 관직이 가족의 재산처럼 취급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물론 프랑스의 모든 공직이 돈으로 거래됐다는 뜻은 아니다. 왕의 직접 임명, 귀족의 특권, 후원관계, 전문적인 경력 등 여러 통로가 함께 존재했다. 그래도 조선과 비교하면 재미있는 차이가 생긴다. 조선에서는 어떤 사람이 몇 년 동안 공부해 시험장에서 답안을 쓴다. 프랑스에서는 어떤 사람이 돈을 지불해 특정 관직을 획득할 수도 있었다. 한쪽은 관직 자격의 중요한 근거를 시험에서 찾았다. 다른 쪽에서는 왕의 권한, 사회적 지위, 재산화된 관직에서도 정당성을 찾았다. 누가 더 낫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국가를 운영할 사람을 만들어내는 방식이 달랐다는 이야기다.
오스만 제국은 국가가 직접 사람을 길렀다

오스만 제국의 방식은 조선과 더욱 달랐다. 오스만에는 **엔데룬(Enderun, imperial palace school)**이라는 궁정 교육체계가 있었다. 국가가 유능한 사람을 선발해 교육하고 행정과 군사 분야에서 일할 엘리트로 길렀다. 특히 데브시르메(devşirme) 등에서 선발된 인재 가운데 뛰어난 사람들은 궁정교육을 거쳐 고위 관료나 군사지휘관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조선은 대체로 이렇게 말했다. 공부해라.
시험을 봐라.
합격하면 국가가 관리로 쓸 수 있다. 오스만은 훨씬 다른 방식이었다. 국가가 사람을 고른다.
국가가 교육한다.
국가가 필요한 관료와 군인으로 만든다. 조선은 시험 선발형에 가깝고, 오스만은 국가 선발·육성형에 가까웠다. 둘 다 강력한 중앙집권국가였지만 사람을 충원하고 키우는 방식은 달랐다.
무굴제국에서는 황제가 등급을 부여했다
인도의 무굴제국에도 거대한 관료·군사조직이 있었다. 아크바르 시기에 정비된 만사브다리(Mansabdari) 제도에서는 황제가 관리와 군사지휘관에게 **만사브(mansab, rank)**를 부여했다. 등급은 개인의 지위와 보수, 군사적 의무와 연결됐다. 특히 자트(zat)는 개인적 지위를, 사와르(sawar)는 유지해야 할 기병 규모와 관련된 등급으로 발전했다. 조선의 관리가 과거시험을 통해 중요한 자격과 명예를 얻는 구조와는 상당히 다르다. 무굴의 중요한 질문이 **“황제가 이 사람에게 어떤 등급과 책임을 줄 것인가?”**에 가까웠다면, 조선에서는 **“이 사람이 국가시험을 통과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 훨씬 강했다. 같은 시대에 존재한 중앙집권국가라도 국가 엘리트를 만드는 방식은 이렇게 달랐다.
그럼 조선은 완벽한 능력주의 국가였을까?
아니다. 시험이 있다고 모든 사람이 같은 조건에서 경쟁한 것은 아니다. 신분이 있었고, 성별의 제약이 있었고, 가문의 경제력에 따라 교육기회가 크게 달랐다. 시험 이외에도 음서와 천거 같은 관직 진출 방법이 있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과거시험 운영에도 여러 문제가 나타났다. 그러니까 조선 과거제를 **“현대보다 먼저 만들어진 완벽하게 공정한 공무원시험”**이라고 설명하면 실제 역사와 멀어진다. 그럼에도 당시 여러 문명과 비교하면 분명한 특징은 있다. 국가의 핵심 관료가 될 자격을 시험으로 증명한다는 생각이 오랫동안 매우 높은 권위를 가졌다는 것. 그 문화가 수백 년간 이어졌다.
1894년, 천 년 가까이 이어진 과거제가 끝난다
1894년 **갑오개혁(甲午改革, Gabo Reform)**이 시작된다. 조선의 기존 신분질서와 국가제도를 근대적으로 바꾸는 과정에서 문과와 무과가 폐지됐고, 전통적인 과거제도 막을 내렸다. 고려 958년부터 계산해도 9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이어진 국가시험형 관료 선발의 큰 축이 사라진 것이다. 그리고 이 무렵 세계사에서는 묘한 일이 벌어진다. 한국에서는 오래된 과거제가 사라지고 있었는데, 유럽에서는 오히려 공개경쟁시험으로 공무원을 뽑자는 생각이 강해지고 있었다.
영국은 19세기에 공개경쟁시험을 강화한다
19세기 중반 영국에서는 기존 공무원 임용의 후원관행이 문제로 지적됐다. 누구를 아는지, 누가 추천하는지가 공직 임용에 큰 영향을 미치는 구조였다. 1854년 **노스코트-트레벨리언 보고서(Northcote–Trevelyan Report)**는 이런 관행을 개혁하고 **공개경쟁시험(open competitive examination)**을 통해 능력을 평가할 것을 권고했다. 1855년에는 Civil Service Commissioners가 설치됐다. 여기서 시간이 묘하게 교차한다. 조선에서는 수백 년 동안 관리가 되기 위해 시험을 준비했다. 그 과거제가 폐지되기 약 40년 전부터 영국에서는 근대 국가에 맞는 경쟁시험형 공무원제를 본격적으로 만들기 시작했다. 두 시험의 목적과 사회구조는 완전히 달랐다. 조선의 과거제는 유교적 왕조국가 안에서 운영됐다. 영국의 공무원제 개혁은 근대국가의 행정 효율과 전문성, 후원제의 폐해를 줄이려는 목적에서 발전했다. 그래도 둘 사이에는 한 가지 공통된 질문이 있었다. 개인의 혈통이나 권력자의 호의보다 능력을 평가해 국가의 사람을 고를 수 있을까?
대한민국에서 다시 시험이 국가공무원 선발의 중심이 된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다. 1949년 **국가공무원법(國家公務員法, National Public Officials Act)**과 고등고시령·보통고시령이 마련되면서 현대 대한민국의 국가공무원 시험이 시작된다. 초기에는 시험뿐 아니라 여러 형태의 임용방식이 함께 존재했다. 1963년 국가공무원법 개정 이후 공개경쟁시험에 의한 신규채용 원칙이 보다 분명해졌고, 1973년에는 공개경쟁채용시험의 학력·경력 제한이 폐지됐다. 오늘날에는 5급·7급·9급 공개경쟁채용시험(公開競爭採用試驗, open competitive recruitment examination) 등이 운영된다. 2026년에도 인사혁신처는 국가공무원 5급, 7급, 9급 공개경쟁채용시험을 실시하고 있다. 직급과 직렬에 따라 PSAT, 헌법, 전문과목, 필기시험, 면접 등 평가 방식은 다르다. 천 년 전과는 모든 것이 달라졌다. 왕도 없다. 양반도 없다. 골품도 없다. 유교 경전을 외운다고 일반행정 공무원이 되는 것도 아니다. 활을 잘 쏜다고 무조건 국가의 군사 관료가 되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시험장의 기본적인 모습에는 묘하게 익숙한 부분이 남아 있다. 국가가 과목과 기준을 정한다. 사람들이 그 시험을 준비한다. 같은 기준으로 평가한다. 합격자를 발표한다. 그리고 합격한 사람에게 국가의 일을 맡긴다.
시험은 계속 바뀌었고, 질문은 남았다
788년 신라에서는 유교 경전을 읽었다. 958년 고려에서는 시와 글을 짓고 국가의 문제를 논했다. 조선의 문관은 문과시험에 들어갔다. 무관은 무과에서 활을 쏘고 말을 탔다. 프랑스에서는 어떤 관직을 돈으로 살 수도 있었다. 오스만은 유능한 사람을 골라 국가가 직접 교육했다. 무굴 황제는 관리와 군사지휘관에게 등급을 부여했다. 영국은 19세기에 공개경쟁시험을 근대 공무원제의 핵심으로 만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오늘날 한국에서는 수많은 사람이 다시 공무원 시험을 준비한다. 시험과목은 완전히 달라졌다. 시험을 볼 수 있는 사람도 달라졌다. 관리가 충성해야 하는 대상도 왕에서 헌법과 국민으로 바뀌었다. 그런데 국가가 계속 고민한 질문 하나는 남았다. 누구에게 국가의 일을 맡길 것인가. 한국에서 그 질문에 반복해서 등장한 대답 가운데 하나는 아주 오래됐다. 시험을 보게 하자. 완벽한 시험도 아니었고 항상 공정했던 것도 아니다. 신분과 가문의 영향력도 컸고 시험 이외의 진출 방법도 존재했다. 그래도 국가가 정한 시험을 통과하는 것이 관료가 될 자격을 증명하는 중요한 방법이라는 생각은 한국 역사에서 놀라울 정도로 오래 이어졌다. 신라에서 시작된 작은 시도는 고려에서 본격적인 과거제가 됐다. 조선에서는 문과·무과·잡과라는 거대한 관료 선발체계로 발전했다. 그 제도는 1894년에 사라졌다.
그리고 전혀 다른 국가와 사회가 만들어진 뒤에도 한국 사람들은 다시 시험장에서 국가의 일을 맡을 사람을 경쟁해서 뽑고 있다. 1,200년 동안 시험문제는 계속 바뀌었다. 국가가 사람을 고르는 방법에 대한 고민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오늘의 한국어 표현
표현: 과거(科擧)
로마자 표기: gwageo
뜻: 고려와 조선에서 국가가 관리를 선발하기 위해 실시한 시험제도. 현대 한국어의 ‘과거(過去, past)’와 발음은 같지만 한자와 뜻이 다르다.
사용 상황: 한국사에서 관리 선발시험을 이야기할 때 사용한다.
예문: 그는 조선시대 과거에 급제해 관리가 되었다.
예문 번역: He passed the state examination during the Joseon period and became an official.
참고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 독서삼품과 — 788년 독서삼품과의 성격과 시험 기준.
-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 고려 과거제 — 958년 과거제 실시, 쌍기, 첫 시험과 합격자.
-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 고려시대 과거 — 고려 과거의 구성과 1390년 무과 1회 시행.
-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 무신정변 — 1170년 정변의 배경과 한뢰·이소응 사건.
-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 조선 과거 문서 — 과거·음서·천거와 조선 과거 운영.
-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 갑오개혁기 개혁안 — 1894년 문과·무과 폐지와 새로운 관리 선발제도.
- Encyclopaedia Iranica — DĪVĀN — 아바스 시대 행정 부서와 관료제의 전문화.
- Cambridge Core — The Price of Offices in Pre-Revolutionary France — 프랑스 구체제의 관직매매.
- TDV İslâm Ansiklopedisi — ENDERUN — 오스만 제국 엔데룬의 행정·군사 엘리트 교육 기능.
- Cambridge Core — From the mamluks to the mansabdars — 무굴 만사브다리 체제와 자트·사와르 등급.
- UK Civil Service Commission — A Better Civil Service — 1854년 Northcote–Trevelyan 보고서와 1855년 Civil Service Commissioners.
- 인사혁신처 — 공무원 채용시험 연표 — 1949년 시험 실시, 1963년 공개경쟁 신규채용 원칙, 1973년 학력·경력 제한 폐지.
- 국가공무원 채용시스템 — 2026년도 국가공무원 공개경쟁채용시험 — 2026년 5급·7급·9급 공채 운영 확인. 확인일 2026-08-21.

